I. 야간 사진의 역사(The History of Night Photography)
- 다게레오타입부터 디지털까지(from Daguerreotype to Digital) -
밤은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고독, 위험, 미스터리, 미지의 것과 연관되어 왔다. 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일상적인 확실성에서 신비로운 미지로 변화시킨다. 밤은 어둠 속에 비밀을 품고 있다. 그 비밀은 우리의 호기심을 사로잡거나, 보호해주거나, 두렵게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밤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불안해하며 움츠러들기도 한다. 불가에서 빛을 피해 나간 선조들은 용감했지만, 결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밤의 모티브는 사진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서양 미술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플랑드르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와 같은 예술가들은 1503년의 걸작인 '지상의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에서 어둠과 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표현했다. 16세기 독일의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와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인쇄업자인 루카스 반 라이덴(Lucas van Leyden)은 작품에는 밤 풍경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아트 반 더 니어(Aert van der Neer)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그의 주요 작품은 고향 네덜란드의 달빛 풍경이었다. 렘브란트(Rembrandt)는 작품에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어두운 톤과 깊은 그림자에 의존한 것으로 유명하며, 반 고흐(Van Gogh)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몇 가지는 밤의 풍경이다. 밤에 매료된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때로 밤이 낮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색이 풍부한 것 같다.'라고 쓰기도 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는 야상곡(Nocturnes)라는 제목의 일련의 밤과 황혼 장면을 그렸고,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밤을 새는 사람들(Nighthawks)'는 도시의 고립과 외로움을 전달하는 20세기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이다. 사진작가도 밤에 영감을 얻고, 이끌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화가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캔버스에 그리지만, 사진작가의 카메라는 렌즈 앞을 지나가는 것만 기록한다. 야간 사진작가의 경우 노출하는 동안 흐르는 시간은 빛 만큼 중요하다.
[1816년에 시작되어 무려 10년의 작업 끝에 니엡스는 유대 지방의 역청으로 코팅된 주석판에 카메라 옵스큐라와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하던 광학 장치를 사용하여 이 사진을 촬영했다. 최소한 8시간 노출시킨 후, 니엡스는 흰색 석유와 라벤더 오일을 혼합한 액체로 판을 씻어냈고, 그 결과 최초로 영구적으로 정착된 사진이 탄생했다. 이 사진은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의 해리 랜섬 센터(Harry Ransom Center)에 전시되어 있다.]
초기 사진 공정은 제한된 감도 때문에 노출 시간이 매우 길었는데, 한 낮에 찍은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1826년에서 1827년 사이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가 찍은 세계 최초의 사진은 프랑스 르 그라의 있는 그의 집 창문에서 찍은 장면이다. 이 사진은 야간 사진은 아니지만, 유대의 역청으로 된 감광성 층이 코팅된 주석 판에 이미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몇 시간에 달하는 노출이 필요했다. 장시간 노출하는 동안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그의 집 양쪽에 그림자가 남게 되었다. 상업적으로 이용가능한 최초의 사진은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었는데, 이 공정은 1839년 최초로 도입되었을 때 햇빛 아래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10분 이상의 긴 노출이 필요했다. 수년 동안 개선과 발전을 이룬 덕에 노출 시간은 몇 년 안에 5~10초로 줄어들었지만, 당시의 약한 인공조명이나 달빛 아래에서 밤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습판 콜로디온 공정(The wet-plate collodion)은 1851년에 발명되었는데, 이는 다게레오타입에 비해 엄청난 기술적 진보였다. 하지만 콜로디온 판은 에멀전이 판에서 건조되기전에 촬영하고, 현상해야 했기 때문에 야간 사진에 필요한 만큼 장시간 동안 노출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했다. 1871년 영국의 의사이자 사진작가인 리처드 리치 매독스(Richard Leach Maddox)는 젤라틴을 빛에 민감한 질산은과 브롬화카드뮴과 결합하여 건식 유리판 네거티브를 만드는 방식을 선보였다. 1878년 최초로 건판을 생산한 사람 중 한 명인 찰스 하퍼 베넷(Charles Harper Bennett)은 에멀전을 32º까지 가열하면 빛에 훨씬 더 민감하고 안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전으로 건판은 유럽과 북미에서 제조되기 시작했고, 10년이 채 되기 전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 후 더 높은 감도를 가진 젤라틴 건판 공정이 도입되면서 야간 사진 촬영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몇몇 초기 사진작가들은 야간 및 저조도 사진 촬영을 실험했고, 19세기 내내 사진은 종종 밤에 찍은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되었다. 1840년, 미국인 존 드레이퍼(John Draper)는 20분의 노출이 필요한 가장 오래된 달의 다게레오타입을 만들었다. 1849년부터 1851년까지 보스턴의 발명가이자 사진작가인 존 애덤스 휘플(John Adams Whipple)과 조지 필립스 본드(George Phillips Bond)는 지구의 자전과 동기화되어 망원경을 움직이는 시계 장치 메커니즘이 장착된 망원경을 통해 달의 다게레오타입을 만들었다. 이때 망원경의 집광 능력은 또한 노출 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그들은 처음으로 달 표면의 디테일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 결과 나온 판 중 하나는 본드의 아버지가 책임자였던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에서 제작되었고, 1851년 크리스털 팰리스 박람회(Crystal Palace Exhibition)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1850년대에 토머스 이스터리(Thomas Easterly)는 다게레오타입 판으로 최초로 번개 촬영에 성공했다. 1860년경부터는 인공 광원을 사용하여 저조도 조건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프랑스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Félix Nadar)는 1861년과 1862년 사이에 파리 아래의 지하 묘지와 하수도를 촬영하여 약 100장의 판을 만들었다. 나다르는 이 사진에 마그네슘 램프와 원시 배터리로 구동되는 전등을 모두 사용했고, 장시간 노출에 작업자를 표현하기 위해 마네킹을 사용했다. 1863년에 휘플(Whipple)은 밤에 보스턴 커먼의 분수를 촬영하기 위해 전등에 대해 실험을 했다. 그는 햇빛 아래에서 0.5초가 필요한 노출이 전등에서는 90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1865년 4월, 스코틀랜드의 천문학자 찰스 피아지 스미스(Charles Piazzi Smyth)는 마그네슘 와이어를 사용하여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내부 통로를 촬영했다.
[1896년 마틴은 '가스등 아래 런던'이라는 제목의 선구적인 야간 사진 시리즈로 왕립 사진 협회(Royal Photographic Society)의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이는 뉴욕의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관심을 끌었다. 마틴은 자서전인 '빅토리아 스냅샷(Victorian Snapshots)'에서 야간 사진을 찍는 동안 경찰관이 그를 정기적으로 미행했다고 말했다.]
19세기 말에 런던의 폴 마틴(Paul Martin)과 뉴욕의 윌리엄 프레이저(William Fraser)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진정한 야간 사진을 상당수 촬영하기 시작했다. 1895년부터 마틴은 런던의 거리 풍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밤에 필요한 긴 노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황혼의 여명이 사라지기 직전에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틴은 밤에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심지어 경찰도 수상함을 느끼고 여러 차례 그가 하는 일을 의심하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야간 사진작가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프레이저는 뉴욕의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런던의 폴 마틴과 함께 19세기 말에 야간 사진을 실행 가능하고 합법적인 예술 형식으로 확립한 사진작가였다. 이 이미지는 원래 1899년 1월 스티글리츠의 Camera Notes에 사진판화로 출판되었으며, 위 사진은 그 복제품이다.]
윌리엄 프레이저는 1896년경에 뉴욕의 야간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그는 투사된 랜턴 슬라이드(projected lantern slide) 형태로 사진을 전시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프린트는 거의 없다. 1897년 스크라이브너 매거진(Scribner’s Magazine)의 한 기사에서 프레이저가 '눈이 내리고 비가 오는 밤에 주목할 만한 공원과 거리 풍경을 촬영하는 데 성공하여 뉴욕의 매우 아름답고 흥미로운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뚜렷하고 진실되게 보여주었다.' 라고 언급되었다. 프레이저가이러한 사진에 '달의 확산된 빛'을 활용했다는 점도 언급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야간의 인공 조명 수준이 훨씬 낮았기 때문에, 달빛은 오늘날 같은 장면을 촬영하는 것보다 이러한 이미지에 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폐렴에 걸린 후 1898년 1월 눈보라가 내리는 추운 밤에 이 사진을 찍었다. 스티글리츠는 이 사진을 특히 자랑스러워했으며, 이 사진으로 인해 야간 사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실제로 미국의 예술과 사진에 미친 그의 영향은 엄청났으며, 지난 세기 초 뉴욕에서 야간 사진이 자리 잡은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사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이미지와 예술 형식으로서의 사진 홍보에 있어서 모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야간 사진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을 기록한 최초의 사진작가로, 1897년에 뉴욕의 거리 풍경을 촬영하기 위해 약 1분 분량의 노출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명의 야간 사진 선구자들이 모두 악천후에서 사진을 찍기로 선택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젖은 포장도로, 비, 눈, 안개는 모두 야간 사진에 드라마틱하고 분위기를 더하는 경향이 있다(현대 야간 사진 작가들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젖은 표면이 거리에서 빛을 반사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1898년의 이미지 '얼음의 밤(Icy Night)'은 스티글리츠가 나중에 이 이미지에 대해 썼듯이 악천후가 어떻게 놀라운 결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완벽한 예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밤, 눈이 매우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나가서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어떻게 하면 아내나 형에게 들키지 않고 집을 나갈 수 있을 지 고민하며 잠시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는 속옷을 세 겹, 바지 두 벌, 조끼 두 벌, 겨울 코트, 티롤리안 케이프를 겹쳐 입었다. 폭풍 때문에 바람이 거세다는 것을 깨닫고 모자를 썼고, 삼각대와 카메라(4X5 플레이트가 달린 원시적인 상자형 카메라)를 들고 집에서 슬쩍 나왔다. 대로의 공원 쪽에 있는 나무들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빛이 비추는 곳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폭풍은 북서쪽에서 불어왔다.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카메라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초점을 맞추었고, 그곳에는 얼음으로 뒤덮여 반짝이는 나무와 눈 덮인 보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할 만한 것은 사진으로 찍힌 적이 없었다.
콧수염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두꺼운 장갑을 꼈는데도 손은 몹시 차가웠다. 차가운 공기가 코와 턱, 귀를 따가울 정도로 시리게 만들었다. 아마도 새벽 2시였을 것이다. 바람과 거의 한 시간 동안 몸부림친 끝에 나는 집에 도착했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발끝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카메라 클럽에 가서 판을 현상했다. 노출은 완벽했다.
놀랍게도 이 당시 스티글리츠는 폐렴을 앓고 있었고, 몸 관리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권고를 받은 상태였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그가 거둔 성공은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비, 안개, 눈 속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아마도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픽토리얼리스트(Pictorialist/ 회화주의)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픽토리얼리스트 사진작가는 소프트 포커스와 조작을 사용하여 프린트에 이상화되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당시 유행했던 인상파 그림을 연상시켰다. 당시 사진은 아직 예술 형식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진작가가 현실을 전달하는 새로운 매체의 기계적 잠재력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사진을 선보일 자신감을 갖기까지는 10년이 더 걸리게 된다.
스티글리츠는 뉴욕 카메라 클럽(New York Camera Club)의 동료들에게 카메라를 들고 밤에도 용감하게 맞서도록 영감을 주었다. 여기에는 앨빈 랭던 코번(Alvin Langdon Coburn), 칼 스트러스(Karl Struss), 폴 하빌랜드(Paul Haviland), 반더 웨이드(W. M. Vander Weyde),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에드워드 스티헨(Edward Steichen)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상당한 수의 야간 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뉴욕과 런던 외의 다른 사진작가들도 야간 사진 촬영을 꾸준히 실험하고 있었지만, 오늘날 이러한 초기의 야간 사진으로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스티글리츠와 그의 동료들이 촬영한 사진이다. 클럽 회원 중에 코번과 스티헨 사이에는 약간의 경쟁이 있었고, 둘 다 유명한 플랫아이언(Flatiron) 빌딩의 황혼 무렵 사진에 대해 연구했다. 스타이켄이 찍은 사진은 그의 걸작 중에 하나로 평가되며, 백금 위에 고무 프린트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 세 개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예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티헨은 이 이미지의 수많은 변형을 만들었으며, 가장 훌륭한 세 점은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기본 플래티넘 인화 위에 여러 번 검 바이크로메이트를 찍어 색을 더했다. 맨해튼의 상징적인 플랫아이언 빌딩을 담은 이 이미지는 픽토리얼리즘 사진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스티헨은 조각가 로댕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 뫼동으로 가서 발자크 기념비의 석고 모형을 촬영했습니다. 스티헨은 조각품의 달빛 풍경을 여러 번 촬영했는데, 어느 날 밤 황혼부터 새벽까지 작업했습니다. 이는 달빛에 완전히 촬영된 가장 오래된 현존 사진 중 일부입니다.]
스티헨은 1908년 로댕의 발자크 조각상을 달빛 아래에서만 촬영한 일련의 사진으로 이 분야에 또 다른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스티헨 이전에도 달빛 아래에서 사진을 촬영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있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887년에 최대 6시간 동안 달빛에 노출시킨 버뮤다의 존 프리트(John Frith)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좋은 사진은 발자크 사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스티헨은 노출에 대해 참고할만한 선례까 없었기 때문에, 이틀 밤에 걸쳐 다양한 노출로 실험을 해야 했다. 그는 조각가 로댕의 초대로 프랑스로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조각가는 이 사진들이 '세상이 이 사진들을 통해 내 발자크를 이해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티헨은 세 장의 대형 인화본을 미국으로 가져왔고, 1909년 스티글리츠의 291 갤러리에 전시했다. 스티헨은 달빛, 황혼, 새벽에 촬영했고 그 중에는 플래시를 사용한 사진도 있었지만, 그가 전시한 세 장은 모두 달빛 아래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이 사진들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직접 구매하기도 했다.
마틴, 프레이저, 스티글리츠 이후 동시대 사진작가들에게 영감을 받은 더 많은 사진작가들이 야간 사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대략 1898년에서 1916년 사이에 발행된 사진 저널에는 스타일과 기법의 발전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남아있다. 1897년 스크라이브너 매거진(Scribner's Magazine)에 실린 스티글리츠와 프레이저의 야간 사진에 대해 찬사를 보낸 기사에 대한 답변으로, 에드워드 반 플리트((Edward Van Fleet)라는 디트로이트 사진 작가는 1896년 디트로이트 트리뷴 빌딩 옥상에서 촬영한 자신의 사진을 인정받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A.H. 블레이크(A.H. Blake)라는 사진작가는 1908년 영국 야간 사진작가 협회(Night Photographer’s Society of England)을 조직하였다. 블레이크는 아메리칸 포토그래피(American Photography) 저널을 통해 자신의 야간 사진 경험을 미국인 독자에게 공유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두 사람 외에도 당시에 야간 사진 촬영에 도전하고 실험하는 사진작가들은 많았을 것이다.
새로운 세기는 이러한 사진 작가들의 작품 스타일과 주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픽토리얼리즘의 낭만적 감성이 모더니즘의 보다 객관적이고 뚜렷하게 정의된 미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1910년경부터 인상주의 픽토리얼리즘 이미지에서 선명하게 초점을 맞춘 모더니즘 사진으로의 전환이 있었으며, 이는 사진 작가 각자의 작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변화는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온 기술의 발전과 태도의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더니즘은 1920년에 이르러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지만, 아돌프 패스벤더(Adolf Fassbender)와 같이 1930년대까지 픽토리얼리즘 감성을 차용한 작가들도 있었다.
[ 바르가스 형제는 1912년부터 1920년대까지 아레키파에서 성공적인 초상화 스튜디오를 운영했지만, 밤에는 달빛, 가로등, 플래시 파우더를 결합한 놀라운 야간 사진 시리즈를 촬영했다. 해외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들 형제는 야간 사진의 진정한 개척자였으며, 누구보다 먼저 밤에 빛 그림(light painting)을 사용하여 사진을 연출했다. ]
사진 기록만 보면 초기 야간 사진에 대한 시도는 유럽과 북미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진 역사가인 피터 옌(Peter Yenne)에 따르면 페루 아레키파(Arequipa)의 바르가스 형제의 놀라운 사진들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카를로스(Carlos)와 미구엘 바르가스 자코넷(Miguel Vargas Zaconet)은 막스 T. 바르가스(친척 관계 아님)이라는 사진작가의 견습을 받은 후, 1912년 아레키파에 상업 사진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들은 시기적으로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아레키파는 새로운 번영과 유럽 문화와 사상의 영향으로 막 꽃을 피우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스튜디오는 번창했고, 인물 사진 외에도 1920년대에 걸쳐 주목할만한 야간 사진들을 만들어냈다. 옌은 '픽토리얼리즘의 영향은 그들의 가장 자의식적인 예술 작품인 야간 사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옌은 사진 기술의 발전과 전등의 출현이 이 작품 시리즈로 이어졌다고 추측한다. 형제의 작품 전시회인 [바르가스 형제, 픽토리얼리즘, 야상곡(The Vargas Brothers, Pictorialism, and the Nocturnes)]에 첨부된 기사에서 옌은 '무성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달빛, 랜턴, 모닥불, 플래시 파우더, 가로등 등을 사용하여 일련의 정교한 장면을 만들어냈다.'라고 썼다. 이러한 연극 장면은 최대 한 시간의 노출이 필요했고, 세부 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하인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아동 노동 관행을 지치지 않고 기록한 사회 복지사였습니다. 하인은 야간 사진 촬영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종종 밤에 사진을 찍었고, 일반적으로 플래시를 사용하여 밤새 일하는 젊은 신문 배달원과 배달부를 비추었습니다.]
바르가스 형제의 연극적 연출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일부 사진작가는 저널리즘 또는 다큐멘터리 목적으로 밤에 사진을 촬영했다. 루이스 하인(Lewis Hine은) 1907년부터 10년 동안 전국 아동 노동 위원회(NCLC)를 위해 전국을 여행하며 사진을 촬영한 사진작가이자 사회학자였다. 하인은 공장에서 일하거나 신문배달원, 우체부로 일하는 아동들의 사진을 남겼다. 픽토리얼리스트 사진작가들과는 달리 하인은 예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없었지만, NCLC가 미국에서 아동 노동을 종식시키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아동들이 처한 열악한 작업 환경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사실 그가 야간에 사진을 찍은 것 역시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일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록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하인의 야간 사진 대부분은 공장에서 일하거나 신문배달원, 우체부로 일하는 아동들의 초상 사진이었으며, 주로 플래시 파우더로 조명을 밝혀서 촬영한 것이었다.
[비얼스는 최초의 여성 뉴스 사진작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또한 밤에 광범위하게 사진을 찍은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는 주로 저널리스트이자 상업 사진작가였으며, 여성이 드문 사진 업계에서 경쟁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비얼스는 1904년 세계 박람회에서 시작하여 그녀의 경력 내내 주로 대형 포맷 뷰 카메라로 많은 야간 사진을 촬영했다.]
제시 타르복스 비얼스(Jessie Tarbox Beals)는 일반적으로 최초의 여성 뉴스 사진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동시에 최초의 여성 야간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비얼스는 1870년에 태어나 1942년 사망하였는데, 이를 통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스티글리츠가 사진계에 막대한 유산을 남긴 것처럼, 비얼스는 놀라운 추진력과 정신력으로 엄청난 역경에 맞서 도전적인 직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놀라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논문이나 알렉산더 알란드(Alexander Alland)가 집필한 1978년 전기에는 야간 사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사진으로 다수가 남아있다. 하버드 대학교의 슐리징거 도서관(Schlesinger Library)에 있는 그녀의 작품 보관소에는 전 경력에 걸쳐 촬영한 야간 사진 프린트가 100장 이상 보관되어 있다. 비얼스는 스티글리츠나 다른 픽토리얼리스트들과 같은 시기에 뉴욕의 야간 사진을 촬영했으며, 스티글리츠와 그의 291 갤러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얼스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의 파빌리온, 보스턴 비컨힐 동네의 가스등으로 밝혀진 집, 그리고 1920년대에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 산타바바라의 미션 스타일 건축물을 여러 번 야간에 촬영했다. 비얼스는 경력 내내 사용했던 8×10 뷰 카메라를 야간 작업에도 사용했다. 큰 뷰 카메라는 낮에도 다루기 어려우며, 밤은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소형 포맷 카메라가 출시되자 많은 야간 사진작가들이 소형 포맷 카메라로 전환하게 된다.
루이스 하인의 다큐멘터리 작업과 제시 타르복스 비얼스의 상업 작업은 야간사진을 보다 실용적으로 활용한 다소 이례적인 사례였으며, 그 이후의 야간 사진 작업은 대부분 이전의 사진작가들처럼 예술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헝가리인 앙드레 케르테스(André Kertesz)는 1914년경 부다페스트에서 야간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1925년 파리로 이사한 후에도 야간 사진 촬영을 계속한다. 파리에 거주 중이던 헝가리 출신의 화가 쥘러 할라스(Gyula Halász)는 1929년 12월 어느 밤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케르테스에게 사진을 소개받게 된다. 나중에 브라사이(Brassaï)로 개명한 할라스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야간 사진 작가가 되었으며,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 작가 중에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1930년대 파리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자석과도 같았고 브라사이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과 함께 살면서 작업했다. 그는 피카소(Picasso), 달리(Dali), 자코메티(Giacometti), 마티스(Matisse), 작가 헨리 밀러(Henry Miller)를 친구로 두었으며, 밀러는 그에게 '파리의 눈(The Eye of Paris)'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브라사이의 사진은 대공황 당시 파리 밤문화의 지울 수 없는 이면에 대한 기록이다. 브라사이는 사진을 시작한 지 2년만에 파리의 거리 풍경과 매음굴, 아편굴, 바, 카바레의 모습을 담은 야간 사진 시리즈를 대량으로 촬영했다. 이 작품의 대부분은 1932년 [밤의 파리(Paris de Nui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는 최초로 출판된 야간 사진을 다룬 책이었다. 당시의 윤리적 기준으로 볼 때 누드와 노골적인 성적 장면을 묘사한 그의 사적인 시선은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 책은 1976년 [30년대의 비밀스러운 파리(Le Paris Secret des Années Trente)]가 출판될 때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브라사이의 사진 속 피사체는 그의 대담하고 직접적인 스타일 때문에 자신들이 사진을 찍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보통 그는 동의를 구하고 협조 속에서 촬영했다. 브라사이는 종종 실내 조명에 마그네슘 플래시 파우더를 사용했는데, 플래시가 터지는 모습을 본 피카소는 그를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밤의 파리'의 출판은 이 분야 최초였을 뿐만 아니라, 사진 판화로 호화롭게 인쇄되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동시대 사진작가들에게 끼친 엄청난 파급력 때문에 일종의 이정표가 되었다. 영국의 사진 작가 빌 브란트(Bill Brandt)는 '밤의 파리'가 출판될 무렵 파리에서 브라사이를 만났고, 이는 빌 브란트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브란트가 어떤 동기에서 그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1932년 함부르크 홍등가에 있는 중국 식당 앞에 아내 에바를 모델로 삼아 브라사이의 매춘부 사진 중 하나를 재현하기도 했다.
브라사이의 사회고발적인 사진은 사람들이 파리의 밤 생활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확인시켜주었지만, 브란트의 초현실주의적 비전은 평범한 것을 신비롭고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브란트는 1930년 파리에서 위대한 초현실주의 사진 작가 맨 레이(Man Ray)를 도왔고, 이 경험은 그의 예술적 비전을 형성하게 된다. 브란트의 책 [런던의 밤(A Night in London)]은 1938년 그래픽 예술 및 공예(Arts et Métiers Graphiques)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출판사는 몇 년 전 브라사이의 '밤의 파리'를 출판했던 곳이었다. '런던의 밤'은 분명 브라사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브란트의 스타일과 작업 방법은 분명 그만의 것이었다. 브라사이의 경우 그가 밤에 방황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피사체로 삼았지만, 브란트는 친구나 가족을 모델로 삼아 야간 사진을 촬영하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취했다. 게다가 '런던의 밤'에 나온 사진 중 몇몇은 실제로 야간 사진처럼 보이도록 어둡게 인화한 낮 사진이었다. 브란트는 표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빌 브란트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브라사이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또 다른 영국 사진작가로는 해럴드 버데킨(Harold Burdekin)과 존 모리슨(John Morrrison)이 있다.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버데킨과 모리슨은 브라사이의 책이 나온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34년에 [런던의 밤(London Nigh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멋진 런던의 야간 사진을 촬영했다. '밤의 파리'와 마찬가지로 런던의 밤도 사진 판화로 인쇄되었지만 검은 색이 아닌 파란색 안료를 사용했다. 이 사진에 묘사된 런던의 조용한 골목길과 어두운 코너에는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에 촬영되었다. 이 사진의 우울한 분위기와 시대를 초월한 고요함은 이 장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거의 같은 시기에 볼크마르 웬첼(Volkmar Wentzel)이라는 젊은 사진작가가 워싱턴 D.C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암실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웬첼도 브라사이의 야간 사진에 영감을 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미국의 수도를 밤에 촬영하였다. 많은 동시대 사진작가들처럼, 웬첼의 워싱턴 랜드마크와 건축물도 주로 안개 낀 밤에 촬영되었다. 웬첼은 그 후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로 오랜 경력을 쌓았음에도, 워싱턴의 야간 사진은 1992년 '워싱턴의 밤(Washington in Night)' 전까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의 폭격으로 1939년에서 1942년 사이에 유럽의 많은 지역은 어둠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어두워진 도시 스카이라인은 당시 야간 사진작가들에게 특이한 기회가 되었고, 특히 두 명의 사진작가가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폭격은 보통 밤에 이루어졌는데, 독일 비행기는 어둠 속에서 적의 영공을 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에 런던의 야간 사진을 촬영했던 이제 빌 브란트는 불빛이 꺼지고 주민들이 지하철 터널에 숨어 피난처를 찾는 매우 다른 도시 풍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보름달은 브란트의 사진에 조명이 되어 주었고, 독일 폭격기의 비행에도 충분한 빛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보름달이 뜬 밤은 가장 위험한 날이었고, 브란트는 어두운 도시를 촬영하면서 런던의 거리가 완전히 조용하고 텅 비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란트의 정전(blackout) 사진은 영국의 릴리풋(Lilliput) 잡지와 미국의 라이프(Life) 잡지를 위해 촬영되었지만, 브란트의 전기 작가 폴 딜라니(Paul Delany)는 이 사진이 사진작가에게 더 깊고 개인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이를 데 키리코데 키리코(de Chirico)의 환상적인 초현실주의 도시와 비교했다. 브란트는 달빛만으로 밝혀진 도시의 모습과 도시가 은폐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1941년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모스크바에 있던 유일한 외국 언론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나중에는 붉은 광장을 내려다보는 호텔 객실 발코니에서 야간 폭격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버크-화이트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작업했으며, 몇 대의 카메라로 작업할 지는 폭격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역시 라이프 잡지에서 일했으며, 1939년 정전 중 런던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1941년 봄, 그녀는 라이프지의 편집자로 러시아에 파견되었고, 독일 폭격기가 도착했을 때 모스크바에 있는 유일한 외국 언론인이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의 묵인으로, 그녀는 거의 모든 외국인이 떠난 후에도 머물 수 있었고,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몇 달동안의 접근 시도 끝내 스탈린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에 러시아의 호텔 정전 감시원이 공습 중에 모든 사람을 지하로 강제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모스크바 폭격을 사진으로 찍었다. 나중에 그녀는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호텔 객실 발코니(크렘린과 붉은 광장을 마주보고 있는)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지하 대피소로 달려갔다.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신호가 내려진 후, 그녀는 돌아와서 셔터를 닫고 욕실에서 필름을 현상했다. 버크-화이트는 '나에게 공습의 심각성은 카메라를 2대, 3대, 4대로 구분할 수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 사진이 촬영된 1942년 당시 잭 델라노는 농장 안보청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전쟁 정보국에서 일하게 된다. 이 사진은 4X5 코다크롬 슬라이드 필름으로 촬영되었으며, 일련의 야간 및 황혼 무렵의 철도 차량장 이미지 중 하나이다.]
잭 델라노(Jack Delano)는 1940년 농장 보안청(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의 사진 작가로 고용되었고 나중에 전쟁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1943년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아치슨, 토페카 & 산타페(Atcheson, Topeka & Santa Fe)의 전시 철도 서비스를 기록했다. 델라노는 야간 철도 차량장 사진에 초창기 4X5 슬라이드 필름을 사용했다. 이 작품은 최초의 컬러 야간 사진 중 일부일 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출하는 동안 철도 차량장 근로자가 그의 사진 속 장면을 걸으면서 남긴 랜턴 빛 줄기로 흥미로움을 더한다. 델라노의 사진은 현재 의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미국에는 1943년 델라노로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어두워진 후의 철로(Rails After Dark)'라고 자칭하는 3명의 사진작가로 이어지는 야간 철도 사진의 오랜 전통이 유지된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이래로 미국인들은 기차와 철도에 매료되어 왔으며, 기차는 오랜 사진의 소재가 되어왔다.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운행되던 증기 철도의 사진은 1955년부터 1960년 사이 윈스턴 링크(O.Winston Link)가 촬영했으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야간 사진 중에 하나이다. 링크는 증기 기관차에 대한 열정을 가진 뉴욕의 산업 사진작가였으며, 디젤 엔진으로 전환하기 전에 노퍽 앤 웨스턴 철도(Norfolk and Western Railway)를 5년 동안 사진으로 남겼다. 링크는 상업 사진 경험을 활용하고, 철도회사와 협력하여 맞춤형 플래시벌브 반사경으로 정교하게 조명을 세팅하고 여러 대의 카메라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링크의 사진은 그가 사용한 복잡한 조명 뿐만 아니라 철도를 따라 조성된 작은 마을의 맥락 속에서 기차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그의 사진 속에서는 종종 사람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차가 지나간다. 링크의 사진은 미국 역사의 중요한 마지막 순간을 포착하고 있으며,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철도를 따라 조성된 작은 마을의 삶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슈타인하이머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주로 밤에 촬영한 열성적인 기차 사진작가 중 한 명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윈스턴 링크보다 덜 유명하다. 슈타인하이머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프 브라우스(Jeff Brouws)와 에드 델버스(Ed Delvers)의 명저 [철로위의 별빛(Starlight on the Rails)]를 참조하라.]
기차를 담은 사진작가 중에는 링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20세기 후반에 기차와 기차역을 촬영했다. 로버트 헤일(Robert Hale), 리처드 슈타인하이머(Richard Steinheimer), 짐 쇼네시(Jim Shaughnessy), 필립 헤이스팅스(Philip Hastings), 멜 패트릭(Mel Patrick), 테드 벤슨(Ted Benson) 등은 모두 1950년대 이후 중요한 기차의 야간 사진을 촬영했다. 이들은 사진작가인 동시에 기차 애호가이기도 했으며, 그들의 사진은 대부분 '오래된 철로와 기차(Vintage Rails and Trains)' 잡지를 통해 소개되었다. 헤일과 슈타인하이머는 링크보다 몇 년전인 1949년경부터 야간 열차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고, 특히 벤슨과 패트릭은 링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1951년 알폰소 산체스 가르시아(Alfonso Sánchez García)는 마드리드를 안전하고 정상적인 장소로 홍보하기 위한 사진을 의뢰받았다. 당시 스페인은 내전과 2차세계대전 중 추축국과의 관계로 인해 훼손된 이미지를 회복하기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알폰소는 마드리드 구시가지의 낭만적인 야경을 [구 마드리드의 구석 : 야상곡( Rincones del Viejo Madrid: Nocturnos)]이라는 제목의 책에 수록하였다. 사진 역사가 헤라르도 F. 쿠르츠(Gerardo F. Kurtz)에 따르면 프랑코의 집권 후 스페인이 여전히 내전과 경제적 고립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호사스럽게 출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스페인의 국제 관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심스러우며, 가르시아가 당시 가장 중요한 스페인 사진작가 중에 한 명이기는 하나 이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의 야간 사진은 놀랍게도 드문 편이지만, 이제는 고인이 된 윌리엄 게드니(William Gedney)의 작품은 예외이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경력 내내 야간에 사진을 촬영했다. 게드니의 야간 작품 대부분은 더 큰 프로젝트의 일부였는데, 켄터키, 브루클린, 인도, 샌프란시스코의 커뮤니티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게드니가 촬영한 한밤중 조용한 동네에서 형식적인 건축에 대한 연구는 주간에 기록한 인간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960년대에는 아마도 사람들이 다른 것에 너무 몰두하여 야간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샌프란시스코가 반문화 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던 것처럼 그 다음 10년 동안 등장한 더욱 두드러진 야간 사진의 중심지가 되었다.
[올먼은 1960년대 후반부터 흑백으로 야간 촬영을 시작했다. 1976년 Kodacolor 400 35mm 필름이 출시되면서 올먼은 야간에 컬러 필름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게드니 외에도 아서 올만(Arthur Ollman), 제리 버차드(Jerry Burchard), 리차드 미즈락(Richard Misrach), 스티브 하퍼(Steve Harper)는 모두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 장르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버차드는 195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의 예술가 집단을 기록하면서 밤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스타일은 자유롭고 느슨했으며, 주로 고속 필름과 비교적 짧은 핸드헬드 노출을 사용했으며, 종종 한 발로 서서 촬영하기도 했다. 이는 스피커와 춤추는 사람들의 진동으로 인해 삼각대를 사용할 수 없는 록 콘서트에서 사진을 찍을 때 사용하던 기술이다. 1960년대 후반에 버차드는 이러한 기술을 밤에 풍경을 촬영하는 데 적용하기 시작했다. 올만은 대학에서 연극에 참여한 후 1966년에 밤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로 무대 위의 배우와 세트에 강조점을 두는 방식과 유사하게, 국소적인 광원에 의해 고립된 피사체를 촬영하는 데 끌리기 시작했다. 올먼은 코닥이 최초의 400 속도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출시한 1970년대 중반에 컬러로 전향했다. 그는 악명 높은 샌프란시스코 안개가 밤에 다양한 인공 광원의 다양한 색상을 흡수하고 혼합하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리처드 미스락는 1974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노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로 시작하여 그의 경력 내내 밤에 사진을 촬영했다. 이 이미지는 원래 분할 톤 기법을 사용하여 광범위한 색상을 생성하는 오래전에 폐기된 아그파 용지에 프린트 되었다. 이 시리즈를 만든 직후 미스라흐는 8 x 10 뷰 카메라와 컬러 네거티브 필름으로 전환했다. 그는 대규모 사진 컬러 인화를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버차드와 마찬가지로 미스락도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로 야간 사진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1970년대 중반 버클리의 텔레그래프 애비뉴(Telegraph Avenue) 의 서브 컬쳐를 35mm 필름의 흑백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그 후 미스락은 사회정치적 다큐멘터리 작업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선인장을 촬영하기 시작했으며, 장시간 노출과 오픈 플래시를 결합하여 전경의 피사체에 주의를 끌었다. 그는 이와 동일한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스톤헨지를 촬영한 후, 1970년대 말에 8×10 포맷과 컬러 네거티브 필름으로 전환했다. 미스락은 경력 내내 야간에 사진을 촬영했다.
[스티브 하퍼는 이 사진을 두고 '모든 것의 보편성을 나타냈다. 나, 담요, 안개, 바다는 모두 같은 물질이다.' 라고 말한다. 하퍼는 1979년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것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나, 담요, 안개, 바다는 모두 같은 물질이다"라고 말한다.33 하퍼는 1979년 샌프란시스코의 예술대학에서 야간 사진에 관한 최초의 대학 수준 강의를 개발하고 지도했다. 그는 나를 포함한 한 세대의 야간 사진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만 지역의 활기찬 야간 사진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퍼는 1960년대 뉴욕의 포드 에이전시 모델로 카메라 앞에서 사진 경력을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 1979년 아카데미 오브 아트 칼리지(Academy of Art College)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야간 사진에 대한 최초의 대학 수준 강의를 개발하고 지도했다. 그는 12년 동안 이 과정을 가르쳤고, 세로운 세대의 야간 사진 작가를 멘토링하여 만(灣, Bay) 지역의 풍부한 야간 사진 전통이 이어지도록 했다. 하퍼는 항상 동료애와 커뮤니티를 중시했으며, 그의 학생들은 강의가 종료된 후에도 오랫동안 함께 사진을 찍고 전시를 했다. 하퍼의 유명한 학생들 중에는 만 지역에서 야간 사진을 홍보하는 조직인 'The Nocturnes'의 설립자인 팀 바스커빌(Tim Baskerville)과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상업 및 산업 야간 사진작가인 톰 파이바(Tom Paiva)가 있다. 하퍼의 사진에는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때로는 그의 학생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하퍼는 여기에 수록된 사진에 대해 '나는 이 사진을 모든 것의 보편성을 나타냈다고 본다. 바다, 하늘, 그리고 내가 분자적 요소로 변형된 것처럼 보이는 방식이다.' 라고 말한다.
[조지 타이스의 뉴저지 주유소 위에 우뚝 솟은 급수탑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아마도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타이스는 1970년대 내내 고향 뉴저지의 황혼과 야경을 8×10 흑백 필름으로 촬영했다. 이 사진의 오리지널 젤라틴 실버 프린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암부 디테일과 빛나는 명부를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야간 사진 촬영 활동의 대부분이 동부 해안에서 서부 해안으로 옮겨갔지만, 동부 해안에는 여전히 밤에 작업하는 사진작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지 타이스(George Tice)는 1970년대 내내 고향인 뉴저지의 야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이미지는 1974년의 'Petit's Mobile Station, Cherry Hill, NJ'일 것이다. 타이스는 주유소 위에 우뚝 솟은 급수탑이 F. H. 에반스(F. H. Evans)의 1898년 사진 '링컨 대성당: 성에서(Lincoln Cathedral: From the Castle)'에서 마을 위로 우뚝 솟은 링컨 대성당을 떠올리게 했다고 말한다. 8 x 10인치 Tri-X 필름으로 2분간의 노출시간이 필요했던 이 사진은 카메라 앞을 자동차가 지나갈 때 마다 렌즈 앞을 가려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10분이 걸렸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빛을 가리기 위해 렌즈를 반복적으로 덮는 이 기술은 끈기과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1896년 폴 마틴(Paul Martin)에 이르기까지 사진작가들이 성공적으로 사용해 온 방법이다.
1979년, 사진작가 얀 스탈레르(Jan Staller)는 뉴욕시 주변의 산업 황무지에서 촬영한 야간 및 황혼의 컬러 사진집을 출간했다. 이 사진은 주제의 초현실적 특성과 스탈레르가 촬영한 장면에서 다양한 산업용 조명을 색상 보정함으로써 암실에서 생성된 특이한 색상으로 유명하다. 스탈레르의 프린트는 단일 광원에 대해서만 균형을 맞출 수 있었지만, 그가 촬영한 장면은 여러 광원에서 동시에 조명을 받고 있었다. 그의 사진 중 다수는 강렬한 붉은 색 또는 보라색 하늘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는 그의 경력 초기에 동향의 사진작가인 빌 브랜트의 발자취를 따라 영국 북부의 공장 마을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브랜트는 1937년에 이 장면을 낮에 비슷한 방식으로 촬영했다. 브랜트의 버전에서 대부분의 톤은 케나의 야간 장면와 반전되어 있어 건물은 어둡고, 하늘은 밝다.]
의심할 여지 없이 20세기 후반 가장 다작한 야간 사진작가는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이다. 1980년대 중반, Kenna는 1930년대에 영국 북부의 산업 도시와 공장 마을을 기록했던 동향의 사진작가 빌 브란트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이 시리즈의 브란트 작품 대부분은 낮에 촬영되었지만, 그의 프린트는 어둡고 대비가 강해서 많은 사진이 거의 밤에 촬영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케나가 거의 50년 후에 같은 장소 중 일부를 밤에 촬영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영국 북부의 산업 지역인 노팅엄셔의 라클리프(Ratcliffe) 발전소 사진을 공개한 후 케나는 더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게 된다. 훌륭한 여행가이기도 했던 케나는 프랑스, 일본 및 기타 여러 장소에서 광범위하게 사진을 찍었으며, 주로 인공 세계와 자연 세계의 교차점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케나는 '기본적인 주제는 풍경과 인간의 지문, 우리가 남긴 흔적, 구조물, 건물 및 이야기 사이의 관계, 대립 및/또는 병치.'라고 말한다. 케나는 '이미지는 낮이나 밤에, 오늘이나 1년 전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케나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다작하고 성공적인 풍경 사진작가 중 한 명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적어도 네 개의 중요한 야간 사진 그룹 전시회가 있었다. 가장 크고 야심찬 것은 홀마크 사진 컬렉션(Hallmark Photographic Collection)의 키스 F. 데이비스(Keith F. Davis)가 큐레이터를 맡았다. 야간 조명, 20세기 야간 사진 조사(Night Light, A Survey of Twentieth Century Night Photography)는 1989년 1월 넬슨 앳킨스 미술관(Nelson Atkins Museum of Art)에서 개막하여 전국 10개 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1991년 샌디에이고의 사진 예술 박물관(Museum of Photographic Arts)에서 폐막했다. 이때 데이비스의 전시 카탈로그가 출판되어 이 장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91년, 사진작가 팀 버스커빌은 샌프란시스코의 산체스 갤러리(Gallery Sanchez)에서 야간 사진 그룹 전시회인 야행성(The Nocturnes)을 큐레이팅했는데, 이는 결국 같은 이름의 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2003년, 윌리엄스 컬리지 미술관(Williams College Museum of Art)은 개인 소장품으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다(Wait Until Dark)'라는 현대 야간 사진 전시회를 선보였다. 2007년,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의 세 기둥 갤러리(Three Columns Gallery)는 내가 큐레이팅한 어둠 어둠(Darkness Darkness)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처음 열었는데, 이 전시회는 34명의 현대 야간 사진작가의 작품을 선보였고, 이후 여러 다른 장소에서 전시되었다.
야간 사진 촬영의 발전은 지난 100년 동안 사진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왔으며, 야간 사진 촬영이 점점 더 쉬워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진작가가 일시적이거나 실험적인 방식이 아닌 정기적으로 이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컬러와 흑백 필름이 크게 발전했고, 지난 15년 동안 디지털 사진이 급속히 발전했으며, 사진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야간 사진 촬영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경찰과 경비원은 여전히 야간 사진작가를 지나치게 의심하는 듯하지만, 일반 대중은 더 이상 어두워진 후에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은 사진작가를 보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야간 사진 작가의 작품을 그 어느때보다 손쉽게 많은 대중들이 접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야행성(The Nocturnes)조직은 1996년부터 웹 사이트(http://www.thenocturnes.com)를 운영해 왔는데, 초창기에는 전 세계의 야간 사진작가들로부터 어둠 속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자신들뿐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을 드러내는 댓글이 많이 올라오기도 했다. 사진 공유 웹사이트 Flickr에서 간단히 검색을 해보거나, 야행성 웹사이트에서 윈스턴 링크의 페이지를 살펴보면 전 세계적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야간 사진의 마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야간 사진의 역사는 여기에서 마무리짓고, 이 책의 다른 장에서 현대 사진작가들의 최근 이미지를 공유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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